2021 ArtE 아트프리즘_여는글_우리를 비추는 우리_류현미_최종.pdf
공간과 매체
지금까지의 공간은 공기와도 같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레 당연한 것, 무색무취의 보이지 않는 공기 같은 것, 이것이 내가 속한 그리고 당신이 속한 공간이다. 지금부터 우리의 공간은 적어도 ‘공기 같은’ 것이 아니다. 공간 사이로 불쑥 떨어져나와 대개는 사람들 손과 책상 위에서 실제 공간을 뛰어넘는 공간, 공간과 공간을 잇는 또 하나의 공간 즉, 매체로서의 공간이다. 어느 날 예고 없이 나타난 이 사물 같은 공간은 우리가 그것에 완전히 속한 것도 속하지 않은 것도 아닌 채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공간, 동시에 우리를 가로질러 연결하는 공간이다.
그동안 예술교육의 공간은 학생과 선생을 약속된 참여의 장으로 안내하는 플랫폼이자 그들이 함께 뛰노는 놀이터, 작업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연히 만나는 작은 오선들, 무대들, 전시장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평화롭지만은 않은 이 공간, 밀고 당김이 엇갈리면서 서로의 존재를 각인하는 장소였다. 이제 이것이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불투명한 인공 매체를 통하여 재발명되어야 하는 것이 비대면 예술교육 환경 속의 공간이다. 당면한 질문은 이 매체 : 공간이 과연 공기처럼 투명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기계적인 숙련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여전히 또는 새롭게 우리 존재의 조건, 소통의 조건, 경험의 조건을 아우르는 예술적 공유의 현장 그 토대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매체
2021년, <ArtE 아트프리즘>의 열쇳말은 **‘사람’**과 **‘매체’**이다. 이는 디터 메르쉬(Dieter Mersch)의 “매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타자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관계적 성격의 사람과 중간적 성격의 매체를 가리킨다. 비대면 예술교육 공간 속에 공동 참여하고 있는 선생과 학생은 예술적 경험을 함께 만드는 ‘사람과 사람’으로서 ‘창의적 제안자와 자발적 동의자’ 그리고 ‘자발적 지지자와 창의적 실행자’라는 상호 역할을 갖는다. 이들은 비대면 상황에서도 서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그것이 자기 존재의 힘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청하고 귀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들을 연결하는 매체라는 다리가 있다.
무엇의 ‘가운데’, 그 ‘사이에 있다’라는 뜻의 어원을 가진 ‘매체(medium)’의 말뜻 그대로 우리는 서로를 잇는 가교 또는 중간물로서의 매체를 탐구한다. 우선 비대면의 간접적인 만남에 수반되는 새로운 공간적 · 도구적 성격의 매체에 집중하기로 한다. 우리는 첫째, 플랫폼으로서의 공간 매체를 탐색한다. 매체로서의 온라인 공간은 오직 그 사용자들에 의해 활성화된다는 점에서 그것 자체로는 미정(未定)의 장소이며 또한, 공간 속 수많은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라는 점에서 가상의 대지와 같다. 그 땅은 누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 장소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양한 층위의 접점을 창안하고 학생과 선생이 그리고 학생과 학생이 보다 다층적으로 연결되기를 모색하려 한다. 하나의 프로그램이 실현되기 위한 여러 성격의 공간과 그것이 조직되는 방식을 탐색하고, 실시간의 온라인 공간과 실제의 현실 장소를 함께 뒤섞기도 하면서 플랫폼의 간접적인 중간지대를 다각도로 시도할 것이다.
둘째, 비대면의 조건에서 가능한 표현 매체로서의 도구를 탐구한다. 창작자의 창작 행위를 이끄는 매개체 역할의 도구상자 개념을 확장하여, 보다 전반적인 대화적 창작 과정에 따른 그 실천 방법을 고민하고자 한다. 시각과 청각으로 축소된 온택트-감각 환경 속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표현과 지각의 방식, 상호적인 교감과 피드백을 위한 비대면의 여러 장치를 발견하여 참여자의 자발적 창작에 필요한 ‘매개적 대화’를 지속해 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비대면의 무감각 상태를 저지하는 관계적 지각과 인식의 순간을 언어화하는 것이 또한, 제어할 수 없는 오차와 오해가 수반된 몸과 사물의 이야기를 탐구하는 것이, 과연 창작 행위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져 보다 확장된 예술적 경험을 생성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탐문하도록 한다.
사람과 공간
비대면 공간은 매개된 현실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더는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 우리 사이 어디쯤 그 가운데에 매개된 무엇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밀리듯 깨닫게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내가 너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남으로써 너와 나 사이 벌어진 틈이 오히려 우리를 살릴 것이다. 그것은 감각의 모든 요소들이 치환 가능한 코드의 세계에서 결코 환원 불가능한 순간을 발명해 냄으로써, 반대로 대체 불가한 원본(들)의 세계에서 기원 없는 표상들이 춤추는 공동의 장으로 진입함으로써 그리하여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나와 너 사이, 우리와 우리 사이, 현실과 비현실 사이, 예술과 비예술 사이를 횡단할 수 있는 틈이다.
팬데믹 이후의 마지막 질문은 아마도 ‘어떻게 우리가 함께 살 것인가’로 향할 것이다. 그것은 팬데믹 이전과 똑같지만 다른 질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대면의 공간 역시 ‘그럼에도 어떻게 우리가 함께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 그 바람이 담긴 곳이 아닐까? 비대면 예술교육의 공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공간, 그래서 너무도 길을 잃기 쉬운 공간, 어쩌면 우리 자신의 결핍을 직면해야 하는 그 공간을 공들여 살피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공기 같은’ 공간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닮은 것은 서로를 비추기 때문이다. 그 되비침을 통하여 우리는 같지만 다른 질문, 같지만 다른 대답을 준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