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_아트프리즘_처음 만나는 식물_남지은.pdf
식물을 만나는 새로운 눈
시 쓰는 일을 한다고 나를 소개하면 누군가는 장난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즉석에서 시 한 편 읊어 달라. 그러고는 꼭 나무나 꽃을 시제로 던져 준다. 열이면 열이 그렇다. 멋쩍은 웃음으로 자리를 모면하면서 나는 당신이 내 시를 읽는다면 얼마나 아연실색할 것인가 상상하곤 했다.(나는 내가 비좁다. 이 문장은 내 시 「넝쿨장미」에 쓰였다. 느린 노래처럼 흘러가는 어느 봄에 나는 담벼락을 뒤덮은 붉은 장미 덩굴을 보았다. 담은 너무 오래되어 곧 쓰러질 듯이 보였고 그러거나 말거나 덩굴은 그 위를 악착같이 기어올랐다. 맹렬하게 몸을 터뜨리는 검붉은 꽃, 뒤엉킨 덩굴과 돋아난 가시, 사이사이를 무심하게 지나는 벌레들…… 화단에 가득 찬 생명력은 아름답거나 경이로운 것이기보다는 벗어나기 힘든 끔찍한 악몽의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지지부진한 삶과 망가진 관계를 벗어 던지고 싶던 시절이라 그랬을 것이다.) 우리가 나무나 꽃을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이를테면 싱그러운 초록빛, 바람에 보기 좋게 흔들리는 잎사귀, 맑고 상쾌한 향기, 살결처럼 보드라운 꽃잎과 미끄러지는 풀벌레 등―은 사실 좁디좁은 상상력 혹은 감각에 그칠 때가 많다. 과연 우리가 우리 아닌 존재를 목도하는 때는 언제인가, 그에 다가가는 방법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
생물 표본과 보존물을 만들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이소요 예술가는 <처음 만나는 식물>에서 식물을 관찰하고 감각하는 과정을 통해 생태를 바라보는 다양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사람마다 식물에 대한 경험과 지식, 가치관이 다를 텐데요. 아주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식물’ 하면 푸른 잎과 화려한 꽃을 떠올리지요. 자연스럽다, 신선하다, 건강하다, 친환경적이다 등의 말을 식물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요. 또 식물과 생태를 일대일로 떠올리기 쉬운데, 이를테면 정책적으로도 도심의 녹지, 공원 등을 정의할 때 그 안에 녹지를 활용하는 시민(인간)이라는 개념과 다양한 식생, 즉 공생하는 수많은 종류의 생물들이 한꺼번에 들어가게 되요. 식물을 분자 수준으로 쪼개봤을 때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과 다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요. 이렇듯 잎과 꽃의 모양 등을 넘어서는 굉장히 다양한 특성을 식물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만나는 식물>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어요.”
이소요 예술가는 자연물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처음 만나는 식물>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밝히면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기까지 품었던 고민을 풀어 놓았다. 먼저, 어떻게 하면 참여자들이 자연물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을까, 자연물을 감각하고 경험하고 조작하는 데 있어 보다 정확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수업이기에 다음과 같은 고민도 있었다. 준비한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비, 음향, 카메라 세팅 등 기술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온라인을 통해 대화와 자료가 공유되다 보니 어떻게 하면 디지털 콘텐츠를 보호할 수 있을지, 서로 의견을 존중하면서 원활하게 교환하는 방법은 무엇일지 등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까지 고민은 이어졌다.
식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방법
식물과의 대화 시간은 총 다섯 번에 걸쳐 이뤄졌다. 먼저 세 차례의 이론과 실습을 통해 식물이라는 대상을 새로운 시선에서 경험하게 하고, 참여자 개별 면담과 각자 작업한 결과물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업 전반에 걸쳐 사용된 도구 상자 ‘툴킷’(코팅지, 켄트지, 표본대지, 루페, 실, 바늘, 책 보수 테이프, 유칼립투스 에센셜 오일, 핀셋, 붓, 나무꼬치, 연필, 네임펜 등 생물 표본을 만들거나 보존물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로 구성)은 비대면 상황에서 예술가와 참여자 간에 연결감을 형성하는 매개물이자 참여자의 창작 과정을 안내하고 촉진하는 도구로서 주요하게 기능하였는데, 이소요 예술가의 섬세한 설계와 준비 과정이 뒷받침됐다. “참여자들에게 툴킷은 영상으로 보는 강사 말고 실제로 감각하고 만날 수 있는 강사이며 매개입니다. 그래서 툴킷 제작 과정에 많은 에너지를 들였어요. 여러 실습 재료와 도구를 펼쳐 놓고 상자에 넣었다 꺼냈다 하면서 여러 가지 조합을 시도해 보았는데요. 참여자들이 상자를 열면 무엇이 가장 먼저 보일지, 어떤 것부터 꺼내 쓸 것인지 등을 고려했어요. 여러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에 참여자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으면서, 상자를 여는 순간부터 온전한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디자인했어요.”
화면 너머로 이소요 예술가와 눈을 맞춘 여섯 명의 참여자들은 평소 식물에 보통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고 미술 등 예술 작업에 대한 이해와 관심 수준이 높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이들은 이소요 예술가가 준비한 툴킷 상자를 열었을 때 첫눈에 마음을 뺏겼다고 입을 모았다. 툴킷 상자에는 뿌리 채 담긴 식물, 과일, 건조되어 변질되지 않는 잎 등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살아 있는 것부터 죽어서 보존된 것까지 여러 가지 식물들이 향기를 뿜으면서 한꺼번에 참여자를 만났으면 하는 이소요 예술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툴킷을 활용한 실습과 창작 과제는 참여자들로 하여금 식물을 마주하는 순간순간에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이를테면 <처음 만나는 식물>의 첫 과제였던 ‘한 가지 방법으로 식물 해체하기’는 참여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식물에 다가가는 첫 걸음이었다. 툴킷 상자에 든 화초(국화과 식물인 ‘아스타’로, 하나의 총포가 수십 개의 꽃을 모으고 있는 형태. 식물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면 편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작업이 다 끝난 뒤에 식물 이름을 공유하였다.)를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체하고 분석하는 과제였는데, 같은 식물을 받았지만 다 다른 방식으로 결과물을 냈다. 자잘한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내 종이 위에 나열하고 보존하는 식으로 관찰을 마친 김도완 참여자는 “그동안 꽃을 이렇게까지 깊이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화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대한 자세히 관찰하자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식물을 해체하고 드로잉한 박해성 참여자는 분석 후에 남은 식물이 마치 식물의 시체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작업을 마친 후에 식물에 미안한 감정이 들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처음 만나는 식물: 여섯 개의 실험1)
<처음 만나는 식물>은 어찌 보면 느슨한 예술창작 공동체이다. 식물의 다양한 물성을 예술창작의 목적으로 직접 다루어 보고, 자신이 실험하고자 하는 작업 과정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대화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참여자들에게 예술적 양분이 되었다. 결과물을 모은 도록에서 조은 참여자는 “식물을 통해 여과된 빛은 아름답다. 이는 잎의 엽록소가 광합성을 한 뒤 남겨진 흔적 같은 것이지 않을까? 스치듯 아름다움을 느껴왔던 단편적인 식물의 상을 쫓아 관찰하였다.”라면서 식물과 빛을 쫓아 그만의 시선을 기록했다. 주다은 참여자는 “한 생명체로부터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록하며, 식물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무는 한 인간과, 한 인간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무는 한 식물에 대해 생각한다.”라고 그의 단상을 남겼다. 수업이 단순히 재미있고 흥미로운 경험 정도로 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참여자들이 자기의 생활 속에서 자연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각자의 창작 시간을 갖는 일, 그 결과물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다른 관점을 확인하는 일은 결코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소요 예술가는 수업이 신선한 경험으로 남는 것을 넘어 사색과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했는데 결과적으로 다양한 창작 결과물을 모을 수 있었던 것에 놀라움을 표하면서, 이번 참여자들이 예술에 대한 관심과 배경을 가지고 있고 창작물을 만드는 데 익숙한 편이라서 가능했다고 본다. 여기에 수업을 이끄는 강사의 적절한 피드백과 자극(수업 주제와 참여자들의 관심사에 맞춤하여 식물에 다가가는 여러 생태학자와 예술가의 작업을 소개하는 등)이 풍부하게 더해졌기에 가능했으리라.